본문 바로가기
한국사

통일신라와 발해

by 곰곰이@ 2024. 3. 21.

통일신라의 발전과 쇠퇴

통일신라는 676년부터 935년까지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하고 신라-당전쟁에서 승리하여 한반도를 통일한 기간을 말합니다. 이 시기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시기 중 하나로 꼽히며, 조선의 문신이자 실학자인 유덕공은 이 시기를 북국인 발해가 아닌 남국이라 불렀습니다. 대신라, 후신라 등의 대체 용어도 사용됩니다. 삼국통일 이후 신라의 영토는 확장되었고 인구도 크게 늘어났습니다. 장기간의 전쟁이 끝나고 대외 관계가 안정되면서 생산량이 증가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태종과 무열왕 이후 중요한 정치적 변화가 일어나 왕권이 강화되었습니다. 태종무열왕은 진골 출신 왕으로 통일전쟁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였고, 이후 태종무열왕의 직계 자손만이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무열왕에서 신문왕에 이르기까지 신라는 절대왕권을 강화하고 군사체제와 중앙관리 체제를 개편했습니다. 신문왕 대에는 김균석의 배반으로 귀족세력이 재편되었고, 집사부와 시종의 기능이 강화되어 화백회의를 주도하고 상대 등 세력을 진압하였습니다. 농촌 제도를 폐지하고 관료적 임금을 지급함으로써 진골 귀족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의 전제화를 실현하는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태종 무열왕의 혈통의 정통성은 5묘제를 통해 강화되었으며, 685년에 시지를 설치하여 영, 경, 대사, 사지, 사의 5급 관직제도를 완성하고 신라의 행정 및 군사제도를 강화하였다. 동시에 9개 성, 5개 소경 제체, 9개 서당(10개 마을) 군사 체계를 확립하여 중앙 및 지방체제를 확립하였습니다. 당나라와의 해상무역과 문화교류는 신라문화의 발전을 촉진시켰고, 김대성의 국제적 영향력 확대는 화려한 문화 예술의 번영을 촉진시켰습니다. 성덕왕부터 경덕왕까지는 통일신라문화의 황금기로서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신라의 안정된 정치체제와 문화발전, 국제 교류는 한반도에 높은 문명을 구축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이러한 문화의 번영은 한글의 창제와 천문학, 수학, 의학 등 과학기술의 발달로 이어져 신라 황금시대를 실현하고 한반도 역사에 귀중한 시기로 기록되었습니다.

 

통일신라와 발해
통일신라

 

10세기에 접어들면서 지방 세력인 견훤과 궁예는 신라 말기의 혼란을 틈타 각각 후백제와 후고구려를 세우면서 신라의 지배력을 약화시켰습니다. 이것이 후삼국 시대의 시작이었고, 고구려 왕실을 무너뜨린 뒤 고려를 건국한 태조는 신라에 대한 우호정책을 펼쳐 신라인들의 신뢰를 얻었고, 신라가 후백제와 맞서 싸우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경순왕의 자진 항복을 이끌어내습니다. 그는 신라를 정복하고 이을 계승하였습니다.

 

통일신라의 쇠퇴는 내부 혼란, 왕권 약화, 귀족 세력 강화, 외압 등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중앙집권 체제가 약화되면서 귀족 가문들이 지방 권력을 장악하고 중앙 정부에 도전하게 되었고, 경제적 약화와 내전, 반란 등으로 신라의 불안정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티베트와 고구려의 압력으로 신라가 약화되었고, 그 결과 북부 지역이 상실되었습니다. 이러한 대내외적 위기는 통일신라의 멸망을 가속화하고 후삼국 시대로의 전환을 가져왔고, 이는 결국 통일신라가 고려로 대체되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 과정은 한반도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통일신라와 발해
통일신라

 

발해의 발전과 쇠퇴

당나라는 668년 안동 도호부을 설치하고 대동강 이북의 고구려 땅과 요동 지역을 점령한 이후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이 계속되자 당나라는 이들을 강제로 영주로 이주시켜 통제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696년 거란의 추장 이진중과 손만영이 영주 태수 조헌(趙泉)의 폭정에 저항했고, 이후 대사리 걸걸중상과 대조영은 영주를 떠나 만주 동부로 이주했으며 진나라를 세웠습니다. 당은 반란을 진압하고 요동 지역과 만주 정복을 통해 발전한 발해국의 건국을 인정했습니다.

 

문왕 시대에 발해국은 계속해서 번영하고 외교가 발전했으며 국내외 무역이 계속해서 강화되었습니다. 당나라가 내전을 겪고 있는 동안, 발해는 선왕대에 영토 확장과 외교 발전을 통해 더욱 번영하게 되었습니다. 8세기와 9세기에 말갈 난민들이 아무르 분지로 이주하면서 발해는 지배 영역을 확대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발해국은 세력을 확장하는 동시에 현지 주민들의 저항에 대처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자신의 역사적 궤적을 그려나갔습니다.

 

선왕이 죽은 후 약 100년 동안 발해의 역사는 명확하게 기록되지 않았지만, 요사에 따르면 수도 급습은 발해의 멸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입니다. 916년 거란의 야율아보기가 거란대왕국을 건국한 후 발해는 약 10년 동안 거란과 요동 지역을 놓고 싸웠습니다. 결국 요동을 잃은 발해는 경제적, 군사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이 과정에서 고구려인들과 동맹을 맺고 있던 말갈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924년 5월 발해는 잠시 요동을 탈환했으나 요군의 잇따른 전략 공격으로 신주는 925년 4월 공격을 받았다. 결국 요군의 기습 공격으로 수도 홀한성은 함락당했습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발해는 요동에 대한 전략적 우위를 잃었고 발해의 경제 및 군사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해는 여전히 강력한 나라였으며 요의 침략을 여러 번 격파하기도 했습니다. 국제정세도 불안했고, 이 기간 발해국은 요를 군사적으로뿐만 아니라 외교적으로도 견제했습니다.

 

924년 여름부터 '이심'이라는 말이 등장한 이후 발해 내부에 문제가 생기자 발해인들은 고려로 망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요는 발해 내부 상황을 파악한 후 발해 방어 체계를 붕괴시키고 발해 요동 방어선을 우회하여 수도를 점령하는 전략을 계획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발해는 926년 요에 의해 멸망되었습니다. 발해 유민들의 저항인 발해 부흥운동은 1116년까지 지속되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습니다. 발해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후발해, 정안, 흥료국, 대발해국 등의 나라들이 차례차례 건국되었고, 후에 요와 금에게 합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