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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조선시대의 건국과 정치구조

by 곰곰이@ 2024. 3. 23.

조선시대의 건국

조선의 건국은 고려 말의 사회정치적 혼란과 명나라의 건국, 신진 사대부 세력의 출현 등 복합적인 요인이 상호 작용한 결과입니다. 고려 후기에는 왕권이 약화되고, 왕족의 부패가 심해지며, 사회적 혼란이 심화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원나라의 멸망과 명나라의 부상은 동아시아의 정세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고, 고려에도 새로운 정치적 흐름을 가져왔습니다.

 

명나라를 건국한 이듬해인 공민왕 18년(1375년)에 명나라는 사절을 보내 건국을 알렸고, 고려는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고려가 명나라와의 관계를 중시하고 새로운 국제정세에 적응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고려 말, 원나라가 쇠퇴하고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국제정치 지형은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국내에서는 신진사대부가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여 성리학으로 나라를 통치하는 세력이 되었습니다. 신진사대부는 온건파와 급진파로 나누어지는데, 전자는 정몽주처럼 고려 개혁을 통해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고, 후자는 정도전처럼 혁명의 역전을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요동반도 진출로 인해 명나라와 외교적 갈등을 겪었고, 요동으로 출진한 이성계는 위화도를 통해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조선을 건국한 주요 세력은 부패한 권문세족을 대체하려는 신진사대부와 외세에 저항하는 데 큰 공헌을 한 무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사회를 추구하고 고려의 낡은 체제를 개혁하고자 했습니다. 조선의 건국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졌고, 건국 이후 한양의 도읍을 정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등 새로운 국가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신진사대부의 세력은 과거제도를 통한 관직 선발 정책 등 실력을 중시하는 정책을 시행하였고, 이는 조선 초기의 정치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진사대부 세력은 처음에는 왕을 대신하고 고려 국가 체제를 유지했으나, 결국 이성계가 왕위에 올라 새로운 나라를 세웠습니다. 명나라와의 관계로 인해 새로운 국호는 조선으로 명명되었습니다. 나라 이름은 명나라 때 정했고, 고조선을 근거로한 조선과 이성계의 고향인 화령(河寧)을 후보로 삼았습니다. 국호를 조선으로 정한 것은 기자조선을 본받아 조선을 중국의 번국으로 인정하려는 명나라의 의지와 그들의 독립을 자각한 신진사대부들의 절충안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조선의 국왕들은 중국으로부터 대관식을 치르는 방식으로 통치했지만, 실제로는 독립된 세습 방식으로 계승되었으며, 조선의 국가 체제 역시 독자적인 국풍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대내외 정치적 상황이 계속 불안정하였습니다. 명나라 홍무제는 외교에 있어 조선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입장을 보였고, 내부적으로는 왕자의 난, 두문불출 등 반대하는 일부 사대부들의 반감을 진압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명과의 외교 강화, 왕권 확립, 내부 분열 극복을 위한 활동이 필요했습니다. 명나라의 경우, 영락제 즉위 이후 사대 외교 관계를 맺어 대외적 불안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내부적으로는 민본 사상과 천명을 앞세워 새 왕조 건국의 정당성을 강화하였습니다. 조선의 국가 기록과 외교문서에는 국가 명칭이 조선으로 기재되어 있습니다. 1876년 부산항조계조약이 체결된 이후에는 '대조선' 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습니다. 동시에 일제 강점기 한국의 역사 편찬 사업의 일환으로 이씨 조선(李氏朝鮮), 또는 이조(李鮮)라는 용어가 형성되었습니다. 한국은 이 용어 사용은 해방 이후에도 큰 비판을 받지 않았으나, 1970년대 후반부터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비판을 받기 시작하여 현재는 거의 사용되지 않습니다.

 

조선시대의 건국과 정치구조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정치구조

조선시대의 정치는 중앙집권적인 관료제를 기반으로 하였으며, 성리학이 국가이념이었습니다. 경국대전에 법제화된 이 체제에서 국왕은 이론적으로는 절대군주였으나 실제로는 왕권과 신하들 사이의 긴장과 타협을 통해 권력이 조정되었습니다. 관리체계는 문반, 무반의 양반으로 구성되어 30급(18급, 30급)으로 나누어 관직을 배정하였으며, 중앙정치는 의정부와 6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의정부에서는 3정승이 정책을 논의, 의결하고 6조는 국가의 행정을 담당했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신권이 강화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는 성리학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유학자들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조선은 성리학을 국가의 정신적 기반으로 삼았고, 사회 전반에 걸쳐 유교적 가치와 질서를 증진시키려 했습니다. 이러한 정치제도와 사상은 조선시대 사회의 기본 틀을 이루었으며, 국가를 통치하는 기본 원칙이 되었습니다. 조선의 정치는 성리학, 중앙집권적 관료제, 왕권과 신권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발전하여 조선사회의 안정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치 체제는 조선을 한국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된 왕조로 만들었고, 조선 왕조의 정치, 사회,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왕권과신권

조선의 정치는 국왕의 이론적인 절대 권력과 중앙집권적인 관료제를 통한 국정 운영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국왕은 이론적으로는 절대주권을 갖고 있지만 실제로는 신하들과의 타협과 조정을 통해 나라를 다스려야 했습니다. 이러한 권력구조는 조선 정치의 주요 특징 중 하나였습니다. 신하들은 중앙집권적인 관료제를 통해 국정을 운영했으며, 왕에게 조언하고 명령을 수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신하들 간의 정치적 갈등과 협력 역시 조선 정치의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국왕은 절대 독재 군주로 존경받으며, 신하를 통제하지 못하면 반정이나 각종 역모와 반란이 일어나기 때문에 국왕은 신하와 타협하고 스스로를 절제해야 했습니다. 왕권과 신권 사이의 긴장과 타협은 왕권을 강화하고 적절한 노선에 따라 신권과 타협하려는 정치의 주요 원동력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왕자의 난과 세조의 난은 왕권과 신권의 갈등을 보여주는 사례로, 조선 전기, 중기, 후기에 걸쳐 정치적 이슈와 지형이 바뀌었지만 왕권과 신권 사이의 긴장과 타협은 계속되었습니다.

 

관료제

조선의 중앙 관료제는 주로 의정부와 6조(육조)로 구성되었습니다. 의정부는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최고 의사결정기관으로, 6조는 국정 전반(인사, 재정, 군사 등)을 운영하였습니다. 관료 선발은 주로 과거제도를 통해 이루어지며, 관료는 교양, 군사, 잡과 등 다양한 시험을 통해 선발되었습니다. 관료는 과거제 외에 추천, 음서 등을 통해 선발하는데, 과거시험을 통한 선발 방식이 가장 일반적이었습니다.

 

지방행정

조선의 지방행정은 국가의 중앙집권적인 통제하에 운영되었습니다. 중앙 정부 정책을 실행하기 위해 관찰사와 목사가 지방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이러한 지방행정체제는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지방행정구역은 부, 군, 목, 현 등으로 도 밑으로 구성되며, 특히 부는 중요한 거점지역으로 관찰사와 동급인 종 2품의 부윤을 파견하였습니다. 각 행정구역의 장들은 중앙정부에 의해 파견되어 중앙집권적인 통치체계를 형성하였습니다. 조선에서 향리는 가장 낮은 수준의 지방 행정관으로 무급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향리는 자신이 소유한 토지에서 수입을 얻고 읍이나 리 단위로 징수된 세금의 자신의 몫을 수취하여 경제적 기반을 활용하였습니다. 이는 규정이 없는 임의적인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관습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향리의 수탈이 조선 후기 민란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의 건국과 정치구조
조선시대